1. 질서? 혹은 폭력?
감옥은 한 사회의 권력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억압과 규율이 혼재된 시간과 공간이다. 감옥은 일반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자기 나름의 시·공간체제를 지닌 독립된 혹은 고립된 일련의 사회적 장이다. 특정한 질서메커니즘을 지닌 ‘사회’라는 조직체는 나름의 법, 도덕, 규범, 제도 등을 수반하기 마련인데,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정한 폭력이 뒤따른다. 이때의 폭력은 물리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기존의 제도나 질서를 무너뜨리는 존재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힘으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질서는 폭력을 전제로 하고, 반대로 폭력은 질서를 전제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렇다고 질서가 곧 폭력과 등치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이 얼마만큼의 정당성을 지니느냐에 따라 합의된 질서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강제된 질서로 나타날 수도 있다.
강제된 질서를 부여하는 폭력이 응축된 곳이 바로 감옥이다. 감옥은 사회질서가 가장 강압적인 방식으로 관철되는 곳이기도 하다. 감옥은 질서를 위반한 모든 이들을 형법의 분류체계에 따라 지배권력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재편입시키는 장치이다. 단순한 감금을 넘어 재사회화 기능까지 맡고 있는 현대 감옥은 한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체계에 내재하고 있는 폭력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감옥에 갇힌 수감자들은 극단적으로 질서화된 시공간에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이다.
감옥이 사회적 장들(social fields)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근대민족(혹은 국민)국가의 출현과 산업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인한 대규모 인구관리의 필요성 때문이다. 근대산업자본주의는 민족국가라는 정치체를 기반으로 사회구성원 대다수를 자본의 이윤축적에 최적화된 육체를 길러내는 새로운 ‘주체생산’를 요구한다. 이윤축적을 위한 육체의 변신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금욕적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관리하는 주체는 19세기에 태동하여 20세 전반에 걸쳐 일반화된 자아로 자리매김했다.
인구관리의 규칙은 이러한 자아상을 준거로 작동한다. 이런 규칙에서부터 벗어난 ‘비정상인’은 근대 권력으로부터 ‘낙인’ 찍히거나 대거 수용소나 감옥 같은 곳에 감금되어 인구관리 규칙을 재주입받는다. 그리고 이들은 ‘죄인’이 된다. 감옥은 이러한 존재들을 집단적으로 수용하여 일정 기간 격리시키는 곳이다. 감옥의 기능은 교화, 재사회화, 범죄예방에 있지만 핵심은 사회의 질서메커니즘을 강제로 혹은 노골적으로 주입시키는데 있다. 이러한 주입은 시간통제, 이동통제, 열악한 주거환경, 제한된 소통과 같은 규율장치를 통해 육체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수감자들의 감정구조를 바꿔놓는 데까지 이른다.
감정은 행위의 준거가 되는 규범이나 동기를 부여하는 생물학적·사회문화적 에너지로서 인지적 판단의 방향성을 설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감옥은 수형자들이 감옥 바깥 세계에서 익혀왔던 감정경험을 뒤바꿔놓는 감정통치 기관이다. 총체적 감시와 통제의 공간으로서 감옥은 수인들로 하여금 이전까지의 자신의 감정구조를 새롭게 직조하도록 유인한다. 가령 감옥에서는 혼자만의 자유로운 시간이 거의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감자는 반강제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자신을 투명하게 만들수록 감옥에서의 삶은 편안해지고 자신을 숨길수록 불안이 가중된다. 반대로 바깥 세계에서는 자신을 노출시키면 시킬수록 불안이 가중되고 숨길수록 안정감을 갖는다. 이처럼 감옥에서의 감정경험은 바깥 세계와 다른 논리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감정경험은 감옥규율에 순응적인 육체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점은 바깥 세계에서의 질서는 감옥에서는 폭력으로 경험된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이 글은 옛 광주교도소의 공간들을 탐색하면서 감옥 공간에 대한 감정사회학적 읽기를 시도한다. 이는 공간에 대한 감정현상학이기도 하다. 필자는 폐허가 되어버린 옛 광주교도소 내·외부 공간을 살펴보면서 각각의 공간적 특성을 감정과 연결시켜 독해하고자 한다. 나아가 교도소의 출입부터 퇴소 과정까지 특정하게 계열화되어 있는 공간의 배치와 그 배치가 행사하는 권력효과를 드러내면서 이것이 수형자들의 감정을 어떻게 구조화하는지 나아가 이 과정의 최후 종착지로서의 육체는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논의해보고자 한다.
2. 질서/폭력의 공간적 배치

< 교도소 >
교도소는 평평한 지면 위에 사각형 모양으로 거대한 장벽에 둘러싸여 있고, 꼭짓점이 되는 지점에는 높은 감시탑이 배치되어 있다. 대략 4.5미터에 달하는 교도소 담장은 안과 밖을 엄격하게 분리시키는 물리적 장치이자 바깥 세계에서 바라던 이상을 완전히 단념시키는 상징적 장치이기도 하다. 이 높은 장벽은 깊은 체념을 유발하기도 한다. 형량을 채워 정문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이 장벽을 넘어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폐쇄된 이 ‘총체적 기관’(고프만)의 높은 장벽은 바깥 세계와의 그 어떠한 소통도 차단해버린다. 높은 장벽은 곧 단념을 의미한다. 바깥 사람들 또한 이 장벽의 거대한 기괴함을 즉각적으로 느낀다. ‘저곳은 낯선 세계라고.’ 그리고 두려움이 밀려든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저 장벽 안의 세계로 갈 수도 있다는 막연한 공포심이 밀려온다면 그것은 바로 거대한 장벽이 뿜어내는 스펙터클 효과일지도 모른다. 이 장벽 하나만으로 수감자에게는 체념과 절망감이, 바깥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막연함 무서움과 소름이 몰려온다.
< 장벽과 감시탑 >
이 장벽 안의 세계는 고도의 규율과 억압이 일상화된 곳으로 달리 보면 질서가 가장 완벽하게 실현되는 곳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교도소에는 범죄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질서가 완전하게 구현되는 이곳이야말로 ‘범죄 없는’ 유토피아일 수 있지만 그 질서가 가장 폭력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이 공간은 디스토피아이기도 하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공존하는 세계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처럼 ‘평온한’ 전체주의 사회이다. 다시 말해 이 평온함이 폭력을 대가로 얻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교도소는 전체주의적 안정성이 확보된 공간이다.

< 교도소 내부 통로 >
전체주의적으로 디자인된 감옥은 전체 건물의 배치와 구조에서 고스란히 구현된다. 대부분 격자형태로 짜여진 건물의 배치는 감시와 이동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결과이다. 건물 내부는 세밀하게 분할되어 있고 통로 곳곳에는 쇠창살로 된 철문들이 설치되어 있다. 세밀하게 분할된 공간은 수형자의 이동과 소통의 흐름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고 통제의 효율성을 높여준다. 권력의 효과는 분절과 분할, 단절과 차단의 원리를 통해 강화된다. 이럴수록 수감자의 육체도 그 흐름에 적응하도록 분할된다. 통로 곳곳에 설치된 창살철문은 이동의 흐름과 차단을 명확하게 구분해주는 통제장치 중 하나이다. 폭력은 이동의 흐름을 자유롭게 차단하고 경로를 바꿀 수 있는 힘이다.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한 수형자들은 전체주의적 공간 흐름에 자신의 육체를 빨리 적응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이동과 소통을 최소화하도록 짜여 있다는 것이다.
< 감방 출입문과 내부 모습 >
감방은 수형자의 죄명이나 특성에 따라 세밀하게 분류되어 있다. 공동으로 생활해야 하는 일반 감방(혼거방)부터 독방(0.75평), 징벌방 그리고 교도소 관리업무를 돕는 소지들이 머무는 방에 이르기까지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모두 원룸이라는 점, 자신의 신체를 놀릴 수 있는 범위가 매우 좁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감방 내부는 가시적·비가시적 경계들로 구획되어 있는데, 이 내부에서도 엄격한 위계질서와 관행들이 존재한다. 대체로 서열이 높은 수인은 출입문 쪽으로 자리를 잡고, 서열이 낮을수록 화장실 쪽에 배치된다. 화장실은 외부에서 볼 수 있도록 거의 절반 이상 개방되어 있다. 감시권력의 시선은 가장 은밀한 곳까지 뻗친다. 수감자가 생활하는 모든 공간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보여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판옵티콘적 설계는 주체의 내밀한 부분까지도 가시화될 수 있게 만들었으며, 감옥은 완전하게 체계화된 공간으로 폭력의 자기생산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모든 게 투명한 공간은 자유가 들어설 여지를 남겨놓지 않는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간은 감시를 내면화한 육체를 생산한다. 인간의 모든 감각은 이러한 공간에 대응하도록 재조직된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모두 감시권력의 반응에 고도로 민감해진다. 이제 비밀도 들어설 여지가 없고 사적인 소통도 불가능해진 공간에서 자아는 자유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감시권력이 자유를 박탈하는 논리는 ‘투명성’에서 나오며, 투명성은 가장 효율적인 감정 통제기제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자신의 속내를 감출 수 없게 만드는 투명-권력은 자아의 내면세계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감옥에서의 투명성은 곧 자유의 박탈을 의미한다.
< 교도소 내부 CCTV, 감시카메라와 통제실 상황판 >
아이러니하게도 투명성은 더욱 강화된 감시를 유도한다. 수감자들의 생활공간 모든 곳이 투명하게 공개되도록 설계된 교도소는 그에 비례한 감시시스템을 구축한다. 보이는 만큼 감시권력이 따라붙는다. 물론 이 때의 감시권력은 대체로 비가시적인 형태로 작동한다. 교도소 곳곳에 설치된 CCTV는 비가시적인 권력의 대표적인 징표와도 같은 것이다. 궁극적으로 CCTV는 물리적 차원을 넘어 감시권력의 상징체계가 된다. 이로써 수감자들은 자신의 내면에 CCTV를 품고 살아간다.
< 감시탑에서 바라본 장벽과 열쇠보관함 >
3. 육체의 파열과 감정통치
교도소 공간은 인간 육체를 세밀하게 분절화하면서 다시금 총체적 질서를 부여하도록 짜여 있다. 바깥 세계에서의 육체를 해체시키면서 동시에 교도소의 질서에 부합하는 총체적 육체를 만들어내는 교도소는 수감자들이 자발적으로 공간적 이음새를 만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교도소는 자의적인 공간 이동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육체를 고도로 수동화시킨다. 수감자들은 교도관의 보호 하에서만 이동해야 하며, 본래의 이동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사이사이에 끌어들일 수 없다. 가령 병원진료를 받기 위한 이동은 그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의 이동과 연계적으로 이어질 수 없다. 수감자의 모든 이동에는 감시가 따르기 때문에 몸의 움직임은 교도소 공간배치의 원리에 따라 분절되고 감시권력의 리듬에 따라 몸의 리듬은 재배열된다.
< 본관 출입구와 내부 >
수동화되고 분절화된 육체는 ‘법과 질서’를 실천하는 신체로 다시 능동화된다. 수감자들은 교도소의 감시와 일과표에 따라 그 흐름 속에 자신의 육체를 재형성해야만 한다. 이는 죄에 대한 징벌이기도 하지만 국가권력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자 근면한 노동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자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법과 질서’는 인간 공동의 삶에서 불가피하지만 질서 이면의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폭력성은 교도소에서 구현된다. 교도소는 한 사회의 ‘법과 질서’ 이면에 깔려 있는 권력의 폭력성 그 자체이다. 역설적이게도 법과 폭력은 뫼비우스띠처럼 연결되어 있다.
수감자가 제일 먼저 경험하는 육체의 파열은 ‘알몸수색’이다. 광주교도소에서 공안수로 복역한 김형주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수감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몸을 의경이나 경찰, 교도관에게 보여주는 것도 모자라, 심하면 쪼그려 뛰기까지 해야 합니다. 여성의 경우는 더욱 심해 여경이 음부까지 들여다보는 경우도 있습니다.······저 역시 알몸수색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다른 모든 곳에서는 공안수라하여 약식으로 몸수색이 진행되었으나, 검찰청 유치장에서 혈기왕성한 의경이 가운을 입히고 옷을 벗긴 다음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적으로 시켰습니다. 의경 역시 같은 남자였지만 그 순간의 수치심과 모멸감은 지금도 잊지 못할 정도로 치욕적인 것이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도대체 무슨 대단한 죄를 지었기에 이런 모멸감을 느껴야 하는가?’짧은 순간이었지만 수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김형주, 2012: 258) 이처럼 알몸수색은 육체에 새겨진 자신의 내밀한 역사를 일순간에 소멸시켜버리는 파열의 과정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인간의 육체는 파열되는 만큼 감정적 파열도 경험한다. 육체는 단순히 생물학적 단위로 환원될 수 없는 의식과 감정의 복합체이다. 의식과 감정이 사회적 삶 속에서 생성된다는 점에서 육체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 따라서 육체에는 사회적인 것이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각자의 삶이 담겨 있는 의미체계이기도 하다. 교도소가 하나의 단일세계로서 ‘사회의 압축판’이라는 신영복의 말처럼 그 세계의 구성원리는 특정한 육체성을 형성해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육체성은 특정한 감정을 수반하면서 전에 없던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 운동장에 설치된 변기와 독방 내부 화장실 >
감옥 내 질서는 수감자로부터 전도된 감정을 이끌어낸다. 숨기고 싶은 자유를 박탈하는 공간은 자아의 은밀한 내면세계를 허락하지 않는다. 미학적 세계를 평균화 혹은 전체주의화하는 감옥세계의 권력은 인간의 감정구조를 바깥 세계와 다르게 바꿔놓는다. 이는 수감자의 모든 것을 투명하게 유지하려는 감옥의 논리로부터 나온다. 바깥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모멸적인 감정을 느낄 법한 상황이 감옥은 그러한 감정 경험을 소외시킨다. 수치심의 전도는 은밀함이 주는 쾌락과 안심 그리고 윤리적 감수성을 사라지게 만든다. 운동장 한 켠 담벼락에 버젓이 설치된 소변기나 방 내부에 설치된 화장실은 배설의 은밀한 즐거움과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은밀한 것을 전면에 드러내야 하는 판옵티콘적 배치는 부끄러움을 느낄 자유를 거세한다.
부끄러움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자아의 방어기제이자 자아의 윤리적 태도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감옥은 부끄러움의 윤리적 요청을 묵살해 버린다. 은밀함이 노출되거나 공개될 때 우리는 치욕과 굴욕감을 느끼곤 한다. 타인에게 감추고 싶은 부분이 드러날 때 때론 조롱과 멸시를 감내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엘리아스가 주장한 바와 같이 문명화과정에서 자아 통제의 강력한 감정 기제인 수치심(엘리아스, 1996)은 교도소에서는 야만적인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오히려 교도소는 은밀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또는 부끄러움을 버려야 온전한 삶을 보장해준다. 은폐와 비밀은 교도소에서 또 다른 처벌 사유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속내를 감출 수 없이 전면 공개된 공간에서 영혼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부끄러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그런 만큼 육체는 탈윤리적이게 되고 폭력에 무감각해진다.
< 혼거방 내부 >
혼거방은 그 내부의 자체 질서에 의해 관리된다. 출입문 명패에는 원칙적으로 인원수와 수감자별로 배정된 위치가 명시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 원칙은 지켜지지 않는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방의 우두머리는 화장실로부터 제일 먼 쪽이면서 출입문 쪽으로 나있는 창문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면 이를 기준으로 위계적인 배치에 따라 제일 약한 사람이 화장실 쪽에 자리를 잡는다. 여기서 약한 사람은 단지 신체적 조건이나 형량 혹은 입소 순서와 같은 물리적·객관적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내부 구원성들 간의 권력게임을 거쳐 결정된다. 가령 이곳에서도 ‘돈 많은’ 수감자가 우대를 받는다. 위계는 감시와 냄새라는 시각과 후각이 권력과 접목된 효과로도 나타난다. 교도관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는 공간과 화장실의 냄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은 이 작은 공간에서도 최대 권력을 가진 자의 소유다.
각자에게 1평도 안 되는 공간이 부여되지만 이 세계에서 권력은 누군가에게는 단 1평의 공간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혼거방은 불균형적으로 분할되어 있으며, 수면, 식사, 세면, 빨래, 휴식 등의 활동 공간 또한 한 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경계가 모호하다. 모호한 경계는 강한 권력을 가진 자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한다. 강한 권력은 자의적으로 경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의적인 경계짓기 과정에서 약자는 위축감, 치욕과 모멸감을 경험할 수 있지만 반면 강자는 위세와 우월감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혼거방에서의 생활은 강자와 약자의 위계서열을 내면화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교도소 내의 규율이 작동하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교도관들이 수많은 수감자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까. 교도소 내의 여러 방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투명한 규율사회이다. 따라서 이 좁은 방 안에서조차 수감자의 육체는 위계와 권력효과에 따라 분열과 해체를 겪는다. 그 위계는 투명-권력에 의해 서열화된다. 가급적 감시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사람과 온전히 까발려질 수 있는 사람이 교도소 내의 계급관계이다.
< 감방 내부 벽에 붙어 있는 잡지사진 >
삭막해 보이는 이 공간에도 교도관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우두머리의 자리)에 젊은 여성모델이나 연예인들의 화보들이 붙어 있다. 주로 일반 잡지에서 찢어오거나 오려온 사진들이다. 이 화보에는 에로틱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여성 모델들로 채워져 있다. 단색의 벽지에 유일하게 컬러 빛을 내는 것은 이 화보 속 모델들 뿐이다. 교도소 내부는 대체로 녹색과 흰색 계열의 색들로 둘러싸여 있고 햇빛이 들지 않는 곳도 많은데, 원색적으로 보이는 화보 속 색감들은 야릇한 생명감을 불어넣는 듯 보인다. 흔해 빠진 여성모델의 화보 사진들이 교도소에서만큼은 희귀하다. 이러한 희귀한 자원은 대부분 권력자의 몫으로 돌아가듯, 교도소에서 서열이 높은 자가 점유한다. 교도소 내부 규정상 벽지에 이런 화보를 붙일 수 없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더욱 내부 세계의 권력자가 그 특권을 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화보 속 여성모델들의 섹시한 몸매를 보면서 통제로부터 조금이나마 위안받을 수 있으려나 모를 일이다.
< 독방 >
독방은 단절과 고립을 통해 육체를 재형성한다. 0.75평 크기의 독방은 몸을 강하게 압박하고 위축시킨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그 작은 사이즈에도 곧 적응한다. 방을 혼자 쓸 수 있는 자유를 얻지만 그에 수반되는 불편함과 고통은 그 자유에 비할 바는 아니다. 교도소의 독방은 좁고 길게 뻗은 직사각형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이 취할 수 있는 자세가 한정되어 있다. 눕게 되면 양팔을 옆으로 뻗을 수 없으며, 돌아누울 때에도 발을 뻗을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다. 일자로 누워 양팔을 아래로 내리거나 안쪽으로 접은 채로 다리만 뻗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대(大)자로 뻗을 수 있는 공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독방은 단순히 물리적으로만 좁아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몸의 자율성을 강하게 억압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불편하다. 게다가 벽과 벽 사이 간격이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고립감을 더욱 심화시킨다. 이처럼 교도소 내에서 독방은 혼자 거주하는 자유를 제공해줄지는 몰라도 공간적으로 가장 부자유로운 공간이다.
교도소가 내세우는 ‘법과 질서’는 독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가장 불편하고 어둡고 고립되고 단절적인 환경을 전제로 한다. 수감자에게 법과 질서를 새기기 위해 설계된 교도소는 육체를 극단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한다. 독방에서 생활했던 김형주는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처음 들어간 방은 독방으로 크기는 0.75평이었습니다. 길이는 방문에서 보통걸음으로 4걸음 반, 폭은 누워서 가슴에 손을 얹고 팔꿈치를 벌리면 팔꿈치가 양쪽 벽에 닿는 아주 좁은 방이었습니다. 방안에는 비닐막과 나무틀로 짜인 문으로 구분되어 있는 뺑기통(화장실)이 있습니다. 처음 이 방에 들어갔을 때의 기분은 그야말로 참담했습니다. 이 좁은 방에서 어떻게 생활하나 걱정이 앞섰기 때문입니다.”(김형주, 2012: 260) 단절과 고립의 방식으로 짜여진 독방은 육체의 사회적 연결성을 차단한다. 독방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노드를 차단함으로써 모든 관계를 단절시키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만든다. 사회적 연결성의 차단은 자유를 극도로 제안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자유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 보장된다.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인간의 자유도 제한된다.
모든 수감자의 방 출입문에는 밖에서만 개폐할 수 있는 강철로 제작된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출입문의 통제권은 방 생활을 하는 수감자가 아니라 바깥에 있는 교도관이다. 잠금장치가 바깥 쪽에 설치되어 있다는 것은 권력의 비대칭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교도소 곳곳에는 외부와의 관계성을 차단하는 장치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일단 교도소 전체를 외부 세계와 차단하는 장벽부터 건물 내부 통로마다 촘촘하게 설치된 철창문에 이르기까지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도록 겹겹이 배치된 차단장치는 각 방의 출입문을 마지막으로 정점에 이른다. 이렇게 이동의 흐름을 차단하는 장치들은 육체의 활동을 분할시켜 통제된 흐름 속으로 재통합시킨다. 이제 몸은 저절로 그 흐름에 내맡겨진다.
< 식구통과 출입문 잠금장치 >
출입문 밑에 뚫려 있는 작은 사각형 모형의 구멍, 즉 식구통은 음식을 배식받는 통로이다. 교도소 공간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부터 통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식사 행위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기본적인 욕구를 통제받는 것만큼이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도 없다. 식구통은 배식자가 음식을 제공하기에 가장 효율적인(혹은 통제하기 수월한) 위치에 설치되어 있지만 수감자 입장에서는 앉은 자세로 혹은 허리를 숙이고 배식을 받아야 하는 위치에 설치되어 있다. 이렇게 비대칭적으로 설치된 식구통은 음식 제공자와 수령자 사이에 각기 다른 감정적 경험을 촉발시킨다. 적어도 수감자에게는 굴욕적인 감정을 충분히 불러일으킬만 하다. 권력의 입장에서 효율적일수록 피지배자는 수치심과 굴욕감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편 음식을 주고받는 행위는 상호 간의 존중감을 표현하는 의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철문을 사이에 두고 팔 하나만 들어갈 수 있는 구멍으로 음식을 주고받는 행위에서 상호존중과 감사의 마음은 교류되기 힘들다. 이처럼 교도소는 음식을 매개로 연결될 수 있는 미세한 감정교환마저도 차단해버린다. 점점 존중에 대한 감각도 무뎌지게 된다.
이곳 옛 광주교도소 내 어느 한 귀퉁이에는 사형장이 놓여져 있다. 조사가 한창이던 4월, 봄날의 기운은 온데간데 없고 사형장으로 들어설 때 엄습해오는 오싹함과 끔찍한 기분은 필자가 경험하지 못한 혹은 단련되지 않은 감정일지도 모른다. 감정은 삶의 과정을 거치면서 단련되기 마련인데, 간혹 생경한 상황과 마주하게 되면 규정할 수 없는 느낌이 의식과 상관없이 육체를 순식간에 감싸버리기도 한다. 그 느낌은 피할 수 없는 ‘무서움’ 같은 게 아니었을까. 생과 사의 마지막 경계선이자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죗값을 치르게 하는 이 공간은 극한의 냉정함, 엄숙함, 고도로 억눌린 슬픔, 비참함, 참회, 억울함, 죄책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감정장(emotional field)이다. 사형집행관들과 사형수 모두 여러 감정들이 뒤섞이면서 비참한 상황을 견뎌야 하는 순간에 각자의 몸은 극한의 분열을 경험한다. 인간이 인간을 죽여야 하는 순간만큼 몸이 분열되는 순간은 없지 않을까.
< 사형장 내부 사진 >
사형장 내부 벽면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고 사형수 자리를 중심으로 정면에는 사형 집행관들의 테이블이 있고 그 테이블과 사형대 사이에 레일이 놓여져 있다. 사형대 앞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바닥은 교수형에 처할 사형수가 형이 집행되면 곧바로 떨어질 수 있게 깊은 지하와 연결되어 있다. 바닥에 깔린 레일은 죄수의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마지막 길이다. 이 짧은 길의 종착지는 저 시커먼 구멍 속이다. 겉보기에도 으스스한 기분을 자아내는 사형대의 구멍은 폭력의 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폭력의 사라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죽은 자는 더 이상 폭력에 시달릴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사진에 나타난 폐허 속 교도소 사형장은 모든 게 정지된 상태로 존재하지만, 여전히 끔찍함이 느껴진다. 교도소 생활을 거치면서 파열된 수형자의 육체도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육체의 소멸과 함께 존재의 의미도 사라진다. 참고로 1997년을 끝으로 한국은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4. 전도된 감정구조: 폭력적 육체의 생산
감옥은 근대사회의 질서를 가장 체계적으로 구현한 곳이지만 반대로 그 질서는 폭력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이중공간이다. 감옥에서 폭력 없는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을 내재한 질서는 당사자들 간의 상호인정을 전제한 소통을 통해 합의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교도소 내 질서는 수감자들과의 소통 절차를 거쳐 합의된 산물이 아니다.
이곳에서 폭력이 행사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물리적 차원으로서 교도소 공간 전체가 육체를 세밀하게 통제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물리적 배치를 통해 움직임과 이동의 흐름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장치들이 사방에 놓여있다. 또 다른 하나는 상징적 차원으로서 자아의 주관적 세계를 철저히 억압하고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끼도록 하는 상징적 폭력이 작동한다. 수감자들은 이름이 아닌 번호로 불리며, 같은 색깔의 수인복을 입고, 개별성을 강탈당한 채 통일된 생활방식을 수행해야 한다. 이 과정은 전에 없던 자아와의 대면이자 동시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이기도 하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상대로 교화를 시켜야 하는 책무를 지닌 교도소는 한 사회의 가장 극단적인 규율체계를 적용하여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교도소는 한 사회의 질서체계에 내재된 강제성이 가장 노골적으로 구현된 곳이다.
< 수감자 방에 붙어 있는 안내문 >
교도소는 엄격한 생활규칙을 적용시켜 순화된 육체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보면 바깥 세계의 사람들은 이미 고도로 순화된 육체를 지닌 존재들이다. 푸코가 포착했던 근대적 육체가 바로 자기 스스로를 규율하는 주체로서 사회의 질서메커니즘을 내면화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폭력성도 내면화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육체에는 폭력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질서를 부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기본적인 질서가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구축된다는 역설이 교도소의 이중성이다. 그리고 이 방식은 바깥 세계와 정반대의 감정구조를 양산해낸다.
먼저 가장 기본적인 욕구(식사, 배변, 수면 등)를 해결하는 방식에서 이들은 존중받지 못한다. 교도소는 수감자에게 ‘열등처우의 원칙’을 내세워 사회의 가장 열악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대우한다. 수감자들에게 인격적인 무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이 과정은 모멸감, 수치심, 굴욕감을 유발하며, 때론 응분과 원한을 낳기도 한다. 사회질서를 파괴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법적 처벌은 원초적인 혹은 생리적인 욕구를 굴욕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해소하게 만든다. 결국 생리적인 영역에서 경험하는 폭력성은 육체에 그 흔적을 남긴다. 폭력에 의해 육체는 순화되기도 하지만 폭력을 수행하는 기관이 되기도 한다.
둘째, 교도소는 육체활동의 모든 흐름을 분절하고 단절화시키면서 이동의 자율성을 박탈한다. 교도소에서의 질서는 이동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동의 자율성은 육체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교도소는 육체의 활동 범위를 최소화시켜 위축된 몸을 만들어낸다. 위축된 몸들이 고도의 통제를 받으면서 이동하도록 설계된 곳이 바로 교도소이다. 질서의 최극단에는 위축된 몸을 생산하는 많은 장치들이 놓여져 있다. 수감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은 대부분 비좁고 여러 체취가 뒤섞인 냄새가 나며, 교도관의 동반하에서만 이동이 가능하고 자신의 모든 행동을 감시할 수 있는 감시카메라가 사방에 설치되어 있다. 위축된 몸은 교도소 규율체계를 순조롭게 받아들인 결과이자 질서 구축의 전제이다. 질서체계에 순응하는 과정에는 여러 감정적 경험들이 수반된다. 규칙을 따르지 않았을 때 치러야 할 징벌이나 수감자들과의 관계 속에 발생할 수 있는 학대나 폭행에 대한 두려움은 순응하는 육체를 만들어낸다. 또한 이동의 자율성을 박탈당한 육체는 사면초가의 상황에 체념으로 응한다. 체념은 한편으로는 가능성에 대한 포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게 해주는 감정이다. 체념함으로써 교도소 규율체계에 빨리 순응하는 전략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질서 확립에 필요한 순응적 태도는 폭력을 내면화한 결과이다. 폭력을 내면화한 육체는 출소와 함께 “새롭게 출발하는 당신”이 된다. 이때 ‘당신’은 폭력이 각인된 육체로 바깥 세계로 나간다.
< 교도소 출구쪽 방향 >
셋째, 교도소는 육체의 모든 것이 ‘다 드러나도록’ 작동한다. 가령 바깥 세계에서는 부끄러운 상황이 생길 경우 숨을 곳이 있고 특히,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교도소에는 부끄러움을 피해 갈 마땅한 공간이 없다. 부끄러움은 타인과 관계에서 자기 자신을 도덕적으로 관리하는 감정이다. 이때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외적 공간이나 자기만의 내면세계가 있어야 도덕적 관리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교도소는 그런 관리를 가능하게 해줄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대다수가 까발려진 채 생활해야 하며 교도소의 폭력체계는 부끄러움을 느낄 여지를 주지 않는다. 부끄러움의 결핍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적절한 거리두기와 도덕감정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게 한다. 역으로 말해서 부끄러움의 결핍은 폭력의 효과이자 폭력적인 육체의 감정성이기도 하다. 부끄러움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는 노골적인 뻔뻔함이나 폭력에 대한 무감각이 정상화된다. 이런 세계에서 타인에 대한 무시와 차별적인 행위는 부끄러워해야 할 ‘나쁜’ 행동이 아니라 우월감을 갖는 ‘영웅적’ 행위가 된다. 폭력적 육체의 생산은 부끄러움이 결핍된, 그래서 성찰할 필요를 못 찾는 주체의 생산이기도 하다. 폭력적 육체의 생산은 언제 다시 또 교도소의 문을 두드릴지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커다란 모순이라면 지나친 과장일까.
< 교도소 입구쪽 방향 >
5. 결론: ‘영상사회’로서의 감옥
다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누가 이런 질서를 만들었는가? 그리고 왜 이런 질서여야만 하는가? 감옥은 사회의 거울이다. 그렇기에 사회는 감옥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형상을 관찰해야 한다. 감옥의 폭력체계는 사회가 은폐하고 있는 사회적 폭력의 실재이다. 즉 사회의 형상은 감옥의 형상을 직조한다. 우리가 얼마만큼 민주주의에 다가섰는가가 감옥의 민주화를 결정하며,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인권을 보장하고 있는가는 감옥에서의 인권체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감옥을 응시할 때마다 소름 돋는 공포와 스산한 기운을 느낀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숨겨진 폭력과 마주한 듯한 이 감정은 깊은 성찰로 유인한다. 이러한 폭력의 근원은 무엇인가? 누구에 의해 이러한 폭력은 정당화되는가?